KBS 한국사전 – 난세에 서다, 백헌 이경석 / KBS 2007.11.3. 방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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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욕과 굴욕으로 얼룩진 병자호란. 이 수모의 역사가 새겨진 삼전도비. 인조는 4명의 신하에게 삼전도비에 새길 비문 찬술을 명령하지만 아무도 그 명을 제대로 수행하지 않는다. 명분으로 사는 조선시대에 항복비문의 작성은 개인과 집안의 수치일 뿐 아니라 후대까지 오명을 쓰는 일이었던 것이다. 과연 누가 고양이 목에 방울을 달 것인가? 난세를 앞서 헤쳐간 명재상, 이경석
그의 파란만장한 삶이 한국사 傳에서 펼쳐진다.

이경석은 왜 삼전도비문을 지은 것일까?
삼전도비는 1639년(인조 17), 청나라 태종이 조선 인조의 항복을 받고 자신의 공덕을 찬양하기 위해 세운 전승비이다.
바로 이 삼전도비문을 지은 사람이 명재상 이경석이다.
병자호란에 패했지만 여전히 청나라를 배척하고 명나라를 섬기는 분위기가 팽배한 조선. 청나라는 조선이 스스로 비를 세우게 함으로써 조선의 패배를 기정사실화하고 명나라와의 관계를 단절 시키고자 했다. 그러나 개인과 집안의 명예 실추와 오명을 감수하며 항복비문을 쓰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당시 핵심관직을 두루 역임하며 명문가의 문장가로 이름이 높았던 이경석 역시 마찬가지 상황!
만약 삼전도비문을 쓸 경우 자신 뿐 아니라 후대까지 불명예를 안을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런데 이경석은 왜, 무엇을 위해 삼전도비문을 지은 것일까?

개인의 명예인가, 국가의 존망인가
조선시대 선비에게 글이란 목숨과도 맞바꿀 수 있는 것이었다.
인조에게 비문 찬술을 명령받은 4명의 신하들은 모두 당대의 문장가였지만 왕의 명령을 제대로 이행하지 않는다. 이경전은 병을 핑계로 자리에 누웠고, 조희일은 고의로 글을 거칠게 써 채택되지 않도록 했다. 결국 이경석과 장유 두 사람의 글을 청나라에 보내지만 심한 질책과 함께 되돌아온다. 장유는 적절치 않은 인용문을 사용했고 이경석의 글은 너무 소략하다는 것이었다. 결국 다시 이경석을 불러 간곡히 부탁하는 인조.
이경석은 국가를 위해 자신의 명예를 희생할 것인가, 아니면 개인의 명예를 지킬 것인가. 삼전도비문 찬술은 조선 전체를 뒤흔드는 명분과 현실 사이의 갈등이었다.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실천한 이경석
이경석이 영의정으로 국정을 총괄하던 효종 1년(1650).
조선을 경악케 만든 사건이 발생한다. 효종이 왜군 침입의 대비란 명목으로 청나라가 엄격히 금지한 성곽수리를 시행한 것이다. 이 사실이 알려지자 청은 곧 조사관을 파견했다.
효종과 백관을 협박하며 왕을 궁지로 모는 청사신. 이 때 이경석이 책임을 자청해 효종은 위기를 모면한다. 하지만 책임을 인정하는 것은 곧 죽음을 의미하는 일. 다행히 이경석은 효종의 간청으로 간신히 극형을 면한 뒤 의주 백마산성에 감금되었다가 이듬해에 풀려났다.
목숨을 걸고 청나라를 막은 이경석. 영의정이란 자신의 직분을 충실하게 이행한 이경석은 오늘날 공직자가 가장 본받아야 할 자세, 즉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실현한 인물이었다.

난세를 헤쳐간 삼조의 충신, 이경석
경기도 분당에 위치한 이경석의 묘. 그런데 특이하게도 하나는 새것이고, 하나는 글귀가 깎여 글자가 보이지 않는 두 개의 비가 서있다. 땅에 묻혀있던 비를 후손들이 다시 세운 것이다.
생전에는 나라의 추앙을 받던 이경석. 그러나 사후엔 비조차 땅에 묻힌 이유가 무엇일까? 74세 되던 해, 현종에게 궤장을 받은 이경석. 궤장은 나라에 공을 많이 세운 신하에게 하사하는 것으로, 당시 50년 만에 이경석이 받은 것이었다.
인조, 효종, 현종에 이른 3대의 임금을 모신 충신으로서 임금과 백성을 위해 한평생을 바친 신하에 대한 국가의 공식적 평가였다. 그러나 송시열은 궤장수여식을 기념해 바친 글에서 이경석을 ‘절의 없는 사람’, ‘삼전도비문을 지어 아첨하고 부귀영화를 누린 소인배’로 비하시켰다.
청을 배격하고 명을 숭배한 존명배청론자의 대표인 송시열은 이경석의 삼전도비문 작성을 인정할 수 없었던 것이다.
특히 조선 후기에 송시열을 추종하는 노론세력이 집권하면서 현재까지 이경석은 제대로 된 평가를 받지 못하고 있다.
승자의 시각으로 기록되고 전해지는 역사. 그러나 실리와 현실을 추구한 이경석이야말로 그 누구보다도 세대를 초월해 가장 필요한 인물이었다.

한국사전 19회 – 난세에 서다, 백헌 이경석 (2007.11.3.방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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