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역사 제 12편-로마 황제정 4: 콘스탄티누스 황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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콘스탄티누스
국가의 운명은 국가의 신들과 존망을 함께하며,
종교는 국가의 원리와 끊을래야 끊을 수 없는 관계에 있다.
“Battle of Abritus”(250).
최초의 게르만족의 로마침입이라는 역사적 사건으로 기록된다.
사사니아의 "샤푸르1세" (241-272)에게 발레리아누스 로마황제가 포로가
된다. 그는 말에 오를 때마다 로마황제의 등을 발판으로 사용하였고 황제는
죽을 때까지 이 수모를 당하였다고 한다(260).
또한, “아우구스투스” 밑에 ”카에사르” (Caesar)-부황제 직책을 신설하여,
황제는 부황제를 양자로 들이고 동시에 부황제들에게 기존의 아내를 버리게한 후, 황제의 딸들과 각각 결혼시켜 그 결속은 안팍으로 빈틈이 있을 수 없었다.
제국이 네개의 지역으로 나뉘어 지고 동등한 자격으로 통치 및 방어를 책임진다.
“Tetrarchy”라 칭하는 체제가 정립된다.
그는 모든 군사들에게 “크리스토” 징표를 방패에 표시하도록 지시했다.
“신이시여,
이번 전투에서 승리하게 하시면 나는 당신을 따르겠습니다!”
라는 맹세를 바쳤다.
“Kathol”은 그리스어로 “보편적”이라는 뜻이다.
“아타나시우스”파가 정통, 즉 보편적 교리로 승인되면서,
“Catholic”은 고유명사의 지위를 얻는다.
“콘스탄티노플” 제국
로마와 그리스의 결합체로 태어났고, 이 제국의 목표 하나는 경제 부흥이었고 다른 하나는 페르샤에 대한 방어였다. 후일, “Theodosius 2세”에 의해 난공불락의 성을 구축하면서 천여 년의 “비잔틴 제국”의 역사를 보존하는 토대가 되었고 제국은 이점에서는 성공하였다.
그러나 서로마가 고유의 라틴문화를 유지하였는데 반하여, 동로마는 오히려 피지배 지역인 그리스 문화에 의해 거꾸로 흡수되었다는 점에서 로마제국은 그 본질적인 종교 및 문화적 지평에서 동-서 간에 커다란 이질감을 나타냈고, 경제적 수준에서 서로마는 대조적으로 더욱 빈곤해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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