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읽는 '광야'…이육사 (1944년 1월 16일 순국) / 비디오머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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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3년 1월 1일 식민치하의 경성. 새하얀 눈길 위를 말없이 걷고 있는 두 남자. 고요한 침묵을 깨는 한 남자의 담담한 다짐.

“가까운 날에 난 북경에 가려 하네···”

그해 봄, 홀연히 북경으로 떠나버린 남자. 그리고 1년 뒤, 1944년 1월 16일, 순국의 넋이 되어 돌아온 그 남자는 40평생 17번의 옥살이와 44편의 창작시를 남긴 수인번호 264, 민족저항시인 ‘이육사’다.

1904년 4월 4일 경북 안동시 도산면 원촌리에서 퇴계 이황의 14대손으로 태어난 이원록(源祿)은 학식과 예를 갖춘 선비들이 모여들던 할아버지의 사랑방에서 ‘경술국치’라는 나라의 암울한 운명과 마주하게 된다.

일본 유학을 떠난 원록은 그곳에서 ‘관동대지진 조선인 집단학살사건’으로 무참히 희생된 조선인과 중국인 수만 명의 억울한 죽음을 직접 목격하게 되고 곧바로 귀국해 항일문화운동에 뛰어들어 조국의 독립을 모색한다.

하지만 1927년, 장진홍 의사가 조선은행 대구지점에 폭탄을 투척한 사건에 연루돼 형제들과 함께 억울한 감옥살이를 시작하게 됐다. 수인번호 ‘264’. 원록은 ‘이육사’ 라는 이름을 짓고 스스로 운명을 바꾼다.

시 쓰는 독립투사가 된 이육사는 조국과 중국을 오가며 항일 운동에 전념했고 ‘조선혁명 군사정치 간부학교’에 1기생으로 입학해 최우등 졸업을 했다.

‘펜’이 무기였던 그는 ‘총’에 익숙한 명사수가 되어 조국으로 돌아왔지만 일제 경찰의 집요한 추적에 비밀공작원 신분이 탄로 나 서대문형무소에 다시 수감되었다.

이듬해 겨울 국경을 넘고 벌판을 달리던 이육사의 봄날을 향한 열망의 육필 '절정'.

“매운 계절의 채찍에 갈겨
마침내 북방으로 휩쓸려 오다.
하늘도 그만 지쳐 끝난 고원(高原)
서릿발 칼날진 그 위에 서다.
어디다 무릎을 꿇어야 하나
한 발 재겨 디딜 곳조차 없다.
이러매 눈 감아 생각해 볼 밖에
겨울은 강철로 된 무지갠가 보다.”

1943년 독립운동을 위해 다시 북경으로 떠난 이육사는 그해 여름 잠시 조국으로 돌아왔을 때 일제 경찰과 헌병대에 붙잡혔다. 이육사가 4살 난 외동딸에게 남긴 마지막 한 마디, “다녀오마”.

그토록 바라던 조국의 독립을 1년여 앞둔 1944년 1월 16일 새벽 5시. 이육사는 마흔이 채 되지 않은 젊은 나이에 중국 북경의 일본총영사관 감옥에서 순국했다.

그가 세상을 떠나고 조국이 ‘대한 독립 만세’를 외친 뒤에야 비로소 발표된 유작 '광야'.
일제의 잔혹한 고문과 억압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저항의 붓을 꺾지 않았던 민족저항시인 이육사.
그가 떠난 지 72년이 지난 오늘. 조국의 치욕은 얼마나 씻겨졌을까. 시인이 뿌린 씨는 어떤 결실을 맺었을까.
‘광야’에서 ‘백마 타고 오는 초인’을 기다리는 사람들의 외침은 72년이 지난 지금도 변함이없는데...

“까마득한 날에
하늘이 처음 열리고
어데 닭 우는 소리 들렸으랴
모든 산맥들이
바다를 연모해 휘달릴 때도
차마 이곳을 범하던 못하였으리라
끊임없는 광음을
부지런한 계절이 피어선 지고
큰 강물이 비로소 길을 열었다
지금 눈 내리고
매화 향기 홀로 아득하니
내 여기 가난한 노래의 씨를 뿌려라
다시 천고의 뒤에
백마 타고 오는 초인이 있어
이 광야에서 목 놓아 부르게 하리라"

이육사 '광야'

콘텐츠제작일 : 2016.01.16
유튜브게시일 : 2017.01.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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