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1년 4월 가평 전투 직후, 서울의 피난민 영 연방 27여단의 임무 교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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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1년 4월 23일부터 4월 25일까지 경기도 가평 일대에서 영 연방 제27여단이 중국군과 벌인 전투이다. 인천상륙작전 이후 반격에 나서 압록강 유역까지 진격해갔던 국군과 유엔군은 중국군의 개입으로 1950년 12월 다시 38선 이남 지역으로 철수했다. 그리고 1951년 1월 4일에는 서울을 포기하고 평택과 삼척을 잇는 북위 37도선 지역까지 물러났다. 하지만 전열을 정비한 국군과 유엔군은 곧 다시 반격에 나서 3월 15일에는 서울을 탈환했으며, 4월에는 기존의 38선 지역까지 진출했다.

그러자 중국군과 북한군은 70만 명에 이르는 대규모 병력을 동원해서 5월 1일 이전에 서울을 다시 점령하는 것을 목표로 대공세를 준비했다.미 제9군단에 배속되어 있던 국군 제6사단은 1951년 4월 17일 영연방 제27여단과 임무를 교대해 가평 계곡을 따라 김화 방면으로 진격해갔다. 그러나 4월 22일 제6사단은 중국군 제20군 제60사단과 제40군 제118사단의 공격을 받았다.

제6사단의 사단장 장도영(張都暎) 준장은 중국군의 공격이 시작되자 사창리 북방의 광덕리와 명월리 일대에 방어진지를 편성해서 중국군의 진격을 저지하려 했다. 하지만 중국군이 이 일대의 험준한 산악 지형을 이용해 방어선을 뚫고 후방으로 진출해 포위해오자, 제6사단의 각 부대들은 통신마저 두절된 상태로 고립되었다. 결국 지휘체계가 마비된 상태에서 퇴로가 차단될 것을 우려한 부대들이 제각기 사창리로 철수하면서 큰 혼란이 발생했고, 이 일대의 방어선은 일시에 무너졌다.

뿔뿔이 흩어져 사창리에서 가평으로 이어지는 도로를 따라 철수한 국군 제6사단은 4월 23일 새벽 화악산(1,468m)과 석룡산(1,153m) 일대에 이르러서야 겨우 부대를 수습하고 병력을 집결시킬 수 있었다. 국군 제6사단은 그 지역에서 방어선을 편성해서 중국군의 진격을 저지하려 했으나, 중국군이 추격해오자 영연방 제27여단의 엄호를 받아 가평의 남서쪽으로 철수해 부대를 정비했다.

중국군이 사창리전투에서 국군 제6사단의 방어선을 뚫고 남하해오자 영연방 제27여단은 중국군의 진격을 저지하기 위해 가평의 북면 일대에 방어선을 편성했다. 중국군이 가평을 점령해서 서울과 춘천을 잇는 국도를 따라 남하해오면 서부전선의 유엔군이 측면에서 협공을 당할 위험이 있었기 때문이다.
영연방 제27여단은 사창리에서 가평으로 이어지는 도로 인근의 고지들에 병력을 배치해 중국군의 진격을 차단하려 했다. 그래서 도로 서쪽인 북면 이곡리의 677고지에 캐나다 대대를 배치했으며, 가평천과 화악천이 합류하는 도로 동쪽의 북면 목동리의 504고지에 호주 대대를 배치했다. 그리고 미들섹스 연대 제1대대로 구성된 영국군 1개 대대를 예비부대로 편성했다.

4월 23일 밤부터 국군 제6사단을 추격해 남하해온 중국군 제118사단이 도로와 계곡을 따라 가평 방면으로 접근해왔다. 중국군은 그날 밤부터 다음날 새벽까지 대규모 병력을 동원해 호주 대대가 지키는 목동리의 504고지에 공격을 가해왔지만, 호주 대대는 고립된 상태에서도 진지를 사수하며 중국군의 진격을 저지했다. 그리고 4월 24일 날이 밝은 뒤에 중국군이 공격을 멈추고 물러나자 추격해서 40여 명의 중국군을 포로로 붙잡기도 했다.

그러나 호주 대대는 전투에서 다수의 사상자가 발생했을 뿐 아니라, 중국군에 퇴로가 차단된 채 포위될 위험이 있었으므로 4월 24일 영국군 대대의 후방으로 철수했다. 그러자 중국군은 그날 밤부터 다음날 아침까지 캐나다 대대가 지키는 677고지 방면으로 집중 공격을 가해왔다. 밤새 치열한 공방전이 벌어졌으나 영연방 제27여단은 중국군의 공격을 물리치고 고지를 지키는 데 성공했다.

4월 25일 중국군이 공격을 멈추고 철수하자 영연방 제27여단은 그날 밤에 미 제5기병연대와 임무를 교대하고 양평으로 철수해 부대를 정비했다. 그리고 영연방 제1사단의 창설 계획에 따라 영연방 제28여단으로 재편되었다.

가평 전투에서 중국군은 사망자만 1천여 명에 이르는 손실을 입고서도 목표를 이루지 못하고 패퇴했다. 이 전투에서 호주 대대는 32명이 전사하고, 3명이 실종되었으며, 59명이 부상을 입는 피해를 입었다. 캐나다 대대에는 10인의 전사자와 23인의 부상자가 발생했다. 미 전차부대와 뉴질랜드 포병부대에도 5명의 전사자와 17명의 부상자가 발생했다.

가평 전투에서 영연방 제27여단이 3일 동안 중국군의 남하를 저지하면서 유엔군은 북한강을 경계로 방어선을 구축할 수 있는 시간을 확보할 수 있었다. 그리고 서울에서 춘천을 잇는 도로를 지켜내 전선을 분할하려는 중국군의 계획을 무너뜨릴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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