탐진치 삼독을 지혜로 부린다(법전스님의 수행기 #2)

다음은 저의 노장님이신 법전 스님의 책 『누구 없는가』에서 ‘인가’라는 글의 전문입니다. 법문을 듣기 이전에 꼭 한번 읽어보시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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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가〉

자리를 털고 일어난 이튿날 오후, 묘적암을 떠나 파계사 성전암으로 향했다. 성철 노장을 찾아가려는 것이었다. 문경에서 버스를 타고 동명이라는 곳에서 내려 성전암으로 올라갔다. 평소 같으면 단숨에 올라갈 거리였으나 겨우내 제대로 먹지 못한 몸으로 산을 넘어가자니 발이 앞으로 나아가지 않았다. 허기라는 것을 그때 비로소 실감했다. 솔잎을 따서 씹고 눈을 입에다 한 움큼 넣어 허기를 채웠더니 입술이 부르트고 입이 얼었다.

가까스로 성전암에 도착하니 이미 자정이 넘은 시각이었다. 달빛에 성전암을 두른 철조망이 어렴풋이 보이자 힘이 솟았다. 담을 훌쩍 뛰어넘어 마당에 섰다. 그리고 소리를 질렀다.
“아악!”
쩌렁쩌렁한 소리가 백 리 바깥까지 나갈 듯 울려 퍼졌다. 안에선 기척이 없었다. 노장의 방 앞으로 다가가 방문을 휙 열어젖혔다. 노장이 눈을 화등잔만 하게 뜨고 나를 바라보았다. 나는 방으로 들어서자 누워버리고 말았다. 오랜만의 편안함을 느끼면서 잠시 누워있었더니, 노장이 시자를 불렀다.
“꿀물 좀 타 온나.”
꿀물을 들이켜고 나자 정신이 조금 났다. 노장은 내 눈을 바라보고는 ‘뭔가 있구나’ 싶었는지 얼굴을 바짝 들이대고 쏘아보았다. 그러곤 거두절미한 채 물었다.
“무자 화두를 일러보거라.”
노장은 그날, 내 공부를 인정하지 않으셨다. 많은 고성과 경책이 오고간 후였다. 그날의 일은 언젠가 내 제자의 공부를 인가할 때나 드러날 수 있을지 모르겠다.
하룻밤을 자고 성전암을 나와 파계사 금당선원으로 공부하러 가는 내게 노장이 말씀하셨다.
“우쨌든 무자 화두를 한마디로 일러보거라. 그 한마디만 똑바로 이르면 끝난다.”
며칠 동안 파계사 금당선원에 머물며 정진에 정진을 거듭했다. 화두 말고는 아무 생각이 없던 그때 매 시간마다 경계가 바뀌는 경험을 했고, 하루 몇 차례씩 금당선원에서 성전암으로 올라가 노장께 공부를 점검받았다. 그때는 온 마음이 화두에 가 있어서 발이 땅에 닿는 줄도 모르고 걸어다녔다. 노장은 철망 안에서, 나는 철망 밖에 서서 화두를 묻고 답하는 나날들이 계속되었다. 그때 참된 변화가 왔다. 어느 날, 노장이 물었다.
“개에게 불성이 없다고 했다. 우째서 없다고 했노?”
내가 대답했다.
“일월동서별日月東西하니 좌인기이행坐人起而行이라!
해와 달이 동서를 구별하니 앉아 있던 사람이 일어서서 가더라.”
노장이 듣더니 큰 소리로 내가 답한 것을 되풀이하며 읊었다.
“일월동서별하니 좌인기이행이라. 일월.......”
며칠 후 노장이 또 물었다.
“우째서 개에게 불성이 없다 캤나?”
내가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돌아서서 가버리자 “말로 해봐라!”
하셨다. 그때 경계를 말씀드렸더니 고개를 끄덕이셨다.

그날, 노장이 시자였던 천제, 만수 등을 불러 분부하셨다. “너거들 가서 떡 좀 해 온나.” 의심을 파한 재, 파참재罷參齋를 해서 대중공양을 하려는 것이었다. 대중들에게 제자의 공부를 이룬 소식을 알리려는 것이었다. 예로부터 선가에선 공부하다가 깨친다든지 득력을 하면 파참재를 하는 게 관행이었다. 수행을 완성해 스승의 지도를 면제받는 의식으로 떡을 해 먹었던 것이다. 스승께선 내가 “좋아하지도 않는 떡을 뭐하러 하십니까?” 하고 사양해서 떡을 하지 않았다. 그렇게 스물넷에 스승을 만나 태산처럼 믿으며 시봉하고 공부한 지 10년 만에 인가를 받은 것이었다.

며칠 후 노장이 또 물으셨다.
“어떤 학인이 스승에게 조사서래의祖師西來意를 물었단 말이다. 그때 스승이 ‘죽은 사람 술상 위에 술이 석 잔’이라고 답했는데 니는 어찌 대답하겠노?”
“제가 그때 있었으면 곡을 세 번 했겠습니다.”
꽉 막혀 있던 자리가 터져버린 듯했으니 무엇을 물어도 대답이 척척 나왔다. 물구덩이, 불구덩이에 떨어진다고 해도 겁날 게 없었다. 노장이 1천7백 공안을 다 물어도 막힘없이 대답할 수 있을 만큼
자신감이 솟았다. 노장이 말씀하셨다.
“니는 이제 됐다. 어떤 것을 물어도 대답할 수 있겠구나.”
파계사 금당선원에 있으면서 가장 공부를 깊게 했고 비로소 공부하는 기쁨을 맛보며 내면이 근본적으로 많이 바뀌었다. 7년 가뭄 끝에 단비를 만난 듯 환희를 많이 느꼈다.

눈을 뜨고 보니 밤과 낮이 둘이 아니었으며 중생과 부처가 둘이 아니었다. 탐진치貪瞋痴가 바로 나였다. 그것은 자성自性을 깨쳐야 실감되는 일이었다. 대장부답게 한번 살아야겠다는 마음이 일었다. 세상 사람들이 보지 못하는 데에 가서 몸을 감추되 나는 세상을 훤히 들여다보고 싶었다. 온 우주를 포함한 모든 세계인 삼천대천세계에서 중심이 되고 가장 높은 산인 수미산으로 올라갔다. 수미산에서 살아볼 작정이었다. 그런데 그렇게 큰 산이 내 엉덩이 속으로 콩처럼 들어 와버렸다. 산은 보이지 않고 내 몸만 덩그러니 드러나 버렸다. 다시 바다 속으로 들어갔다. 수미산 주위를 둘러싸고 있는 큰 바다인 향수해 속으로 몸을 감추고 세상을 들여다보고 싶었다. 그런데 이번에는 향수해의 그 넓은 바닷물이 내 발 밑에서 자작거리고 마는 것이었다. 몸을 감출 수가 없었다.

開眼卽知三毒我
離乎此業無眞我
貪瞋癡滅死為全
噫彼眾生同體我

눈을 뜨니 삼독이 바로 참나인지라
이 업을 여의면 진아도 없어짐이라
탐진치가 멸해야 제대로 죽을 수 있으니
아! 저 중생들이 모두 나의 분신일세

불교에선 탐진치 삼독을 없애야 성불한다고 했는데, 눈을 뜨고 보니 탐진치 삼독이 참나였다. 그 삼독을 떠나선 내가 존재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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