붓다의 꿈! 불교의 깨달음은 '입자(ego)와 파동(전체의식)'을 알면 끝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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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까지 과학에서 밝혀낸 물질의 실체는 입자와 파동입니다. 입자와 파동이라고 이름을 붙였지만, 사실 그것들의 영역이 고정된 것이 아니어서 입자성과 파동성이라고 부르는 것이 정확할 것입니다.

 

사실 입자라는 것이 아직까지 과학으로 증명된 적이 없고, 실험실에서 관측 가능한 것은 뭔가 덩어리를 이루려는 입자의 성질뿐이니까요. 파동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파동이란 입자성을 지닌 것들이 단절되지 않고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결국 입자성과 파동성이란, ‘덩어리를 이루면서도 동시에 연결되어 있는 성질’을 가리킵니다. 쉽게 말하면 만물이 ‘하나이면서도 둘 인 것’ 같은 무언가를 보여주려고 애쓰고 있는 모습이지요. 이것이 현재까지 과학에서 밝혀낸 물질의 실체입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정신과 몸은 어떨까요?

 

이것 역시 입자성과 파동성의 영향을 받고 있습니다. 입자성은 외계와 단절된 ‘나’라는 영역을 고착화합니다. 전적으로 我相의 주범인 것이지요. 반면에 파동성은 ‘나’가 단절되지 않고 주변과 연결되어 있다는 의식을 자아냅니다. 그래서 파동성이 강할수록 ‘나’는 약화되고 그 궁극에 이르면 無我가 됩니다. 입자성이 자취를 감추고 파동성만이 의식의 전체를 채우고 있는 상태인 것이지요. 파동으로 존재하니 삼라만상 전체가 ‘나’이고, 이때의 ‘나’는 개체가 아니기에 ‘나’란 명칭도 어울리지 않습니다. 그래서 파동이 조장하는 전체의식을 가리켜 참나, 본성, 불성 등으로 다양하게 부릅니다.

 

그렇다면 전체의식이 되었을 때 나의 몸은 어떤 변화를 일으키게 될까요?

 

입자성에 의해 ‘나’가 강화되었을 때의 몸은 일종의 전쟁터와 같습니다. 적자생존에서 살아남기 위해 모든 기능들이 전투 대형으로 바뀌게 됩니다. 보초도 서야 하는데 이것으로 인해 늘 신경이 곤두섭니다. 신경세포들이 적의 공격을 감지하면 스트레스라는 사이렌도 마구 울려 댑니다. 스트레스 사이렌은 극도의 불안감을 조성하고 심장과 위장을 비롯한 주요 장기들을 위축시킵니다. 사이렌이 울릴 때 대피소로 피해야 하듯, 장기들은 방어 체제로 전환하면서 제 기능을 못하게 되는 것이지요.

 

그런데 경고성 스트레스보다 상황이 심각하면 실전 모드로 돌입합니다. 전투를 실행하기 위해 뇌의 베타파는 극한으로 오르고, 여기에 맞춰 중추신경계는 최대한 경직됩니다. 이와 동시에 면역체계는 부분 휴업에 들어가면서 백혈구의 생산이 급감합니다. 계엄령이 선포 될 때 경제 활동이 멈추는 것처럼 신체의 대사 작용 역시 커다란 피해를 보게 되는 것이지요.

 

그런데 다행인 것은 일상사에서 이런 실전 상황이 그리 오래 지속되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얼마 지나지 않아 전쟁은 그치고 정전 상태로 돌아오게 됩니다.

 

하지만 정전 상태로는 웰빙(well-being)에 한참 부족합니다. 왜냐하면 구조적으로 스트레스 사이렌은 늘 켜 놔야 하기 때문입니다.

 

입자성이 강한 사람들, 다시 말해 에고(ego)가 강한 사람들이 이런 정전상태에 놓여 있게 됩니다. 이에 비해 휴전상태인 사람들은 좀 더 낫습니다. 마음을 웬만큼 다스려 남들과 다툴 일을 대폭으로 줄인 사람들이 여기에 해당합니다. 그러니 그만큼 몸은 전쟁을 잊고 자신의 기능에 충실하게 되겠지요. 이것이 소위 말하는 웰빙의 전형적인 모델입니다.

 

여기서 더 나아가면 휴전도 넘어서 평화를 이룬 사람들이 나오는데, 그들이 곧 수행자들입니다. 이들은 에고(ego)를 상당히 낮춤으로써 상극의 불씨를 거의 꺼버린 사람들입니다. 이렇게 되면 의식의 입자성은 힘을 발휘하지 못합니다. 파동성만이 의식을 가득 채우고 잔잔한 알파파가 뇌파의 중심을 잡게 됩니다. 파동성에 의해 외계와 연결되었다는 의식을 갖게 되고, 더 나아가면 삼라만상과 하나가 됩니다. 존재만 할 뿐 ‘나’라는 입자의 영역은 자취를 감추게 되는 것이지요.

 

세간에는 이렇게 된 의식을 일러 깨달음이라고 말하는 데 주저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이때의 의식을 순수의식, 본성, 참나, 불성 등으로 높이 부릅니다. 어쨌든 無我의 파동으로 영원히 존재하는 상태가 된 것이니 충분한 가치가 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런 파동의 전체성이 깨달음을 온전히 표현할 수 있을까요?

 

파동에 의한 깨달음은 인류의 모든 성자들의 공통된 주장입니다. 그러나 딱 한 사람만 이런 깨달음을 부정했습니다. 아니 부정한 것이 아니라 그 위에 더한 깨달음이 있다고 봤습니다. 그가 바로 불교를 창시한 싯다르타입니다. 싯다르타는 순전한 전체의식도 온전한 깨달음으로 보지 않은 것입니다. 그는 이런 전체의식을 일종의 꿈으로 봤습니다. 입자성의 에고(ego)에 시달리던 사람들이 수행을 통해 파동성의 전체의식을 이루어 행복한 꿈을 꾸고 있다고 본 것이지요.

 

그가 전체의식을 꿈이라고 본 이유는 바로 ‘앎’이 없기 때문입니다. 꿈과 현실의 차이는 ‘앎’에 있습니다. 그렇듯 현재의식과 깨달음을 구분 짓는 잣대 역시 ‘앎’입니다. 이때의 ‘앎’은 일반적인 지식으로는 어림도 없고, 어떡하든 실존(제1원인)에 대한 자각이 전제돼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그냥 전체의식에 휩싸여 영생과 열반의 황홀경을 꿈꾸는 것에 불과하게 됩니다.

 

싯다르타 역시 이런 파동의 꿈을 한바탕 꾸고 난 뒤에 겨우 이것이 꿈 인줄 알았습니다. 그는 행복한 꿈을 원했던 것이 아닙니다. 싯다르타는 오로지 ‘존재’를 알고 ‘나’를 앎으로써 진리를 깨우치고 싶었습니다. 어떻게 이런 입자성과 파동성에 의한 세상이 존재하는 지에 대한 명확한 이유를 알고 싶었던 것이지요.

 

그것을 알기 위해서는 거듭 말하지만 ‘제1원인’을 증명하는 수밖에 없습니다. 그것을 알게 되는 순간 입자성의 ‘나’와 파동성의 ‘전체의식’에서 깨어나게 됩니다. 인류의 모든 성인들이 오매불망하던 파동성의 ‘전체의식’에서도 깨어나 존재의 실체를 명확히 알게 되는 겁니다.

 

그렇게 알게 된 이후는 어떻게 변할까요?

 

꿈과 현실이 둘이 아님을 알게 됩니다. 그래서 입자성으로 살아가든 파동성으로 살아가든 그 둘을 적절히 섞어서 살아가든 전혀 개의치 않게 됩니다. 왜냐하면 그냥 모든 것이 한바탕의 꿈이면서도 생생한 현실이니까요.

 

 

 

여러분은 행복한 꿈을 꾸고 싶으신가요? 아니면 꿈에서 한 번이라도 깨어나 보고 싶으신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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