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주를 대표하는 배, 홍어, 곰탕의 먹거리 이야기! 모든 것이 풍요로워 작은 서울이라 불렸던 전남 나주 (KBS 20131005 방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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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재발견 [땅의 노래, 세월을 타고 흐르다 - 전남 나주]

▶ 나주를 살게 하는 대자연 - 영산강과 나주평야
남도의 젖줄이라 불리는 영산강. 영산강은 호남을 관통하며 흐르는 젖줄이지만 나주에 와서야 비로소 그 광활함과 비옥함을 제대로 느낄 수 있어 ‘나주의 강’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나주에서 영산강은 문화를 실어 나르는 길이었으며 나주평야를 적셔주는 생명의 원천이었다. 영산강물이 두루 흐르며 우리나라 최고의 곡창지대로 손꼽혀온 나주평야는 바다가 있어 해양성 기후로 예로부터 주곡농업과 원예농업이 발달하였다. 나주는 이 나주평야의 쌀 때문에 남도의 중심도시가 될 수 있었고 나주목은 전국에서도 평양 다음으로 권위있는 도시가 될 수 있었다. 나주 하면 떠오르는 첫 번째 모습, 누렇게 익어가는 가을 들녘의 모습으로 나주 여행을 시작해본다.

▶ 나주를 움직이는 두 개의 배 - 나주배 & 영산포 황포돛배
나주엔 예로부터 두 개의 배가 있다 전해진다. 너른 들녘에서 고단한 노동을 달게 하던 ‘꿀’맛의 배가 하나요. 영산강을 타고 전국으로 가던 타는 배가 그것이다. 시대가 바뀌어도 여전히 입맛을 사로잡는 과일이자, 전국에서 소문이 자자한 나주배. 나주배가 유독 달콤함이 높은 이유는 영산강이 만들어준 비옥한 옥토와 영산강을 타고 온 바닷바람, 해풍 때문이다. 영산강 바람을 타고 온 또 하나의 나주 배. 황포돛배는 온갖 물자를 들여오고 내보내며 나주를 움직이던 배였다. 내륙 깊숙이 자리한 포구 영산포는 황포돛배가 오가던 거점으로 수많은 물자와 사람이 오고 가던 경제중심지요 교류의 장이었다.

▶ 이야기가 있는 먹거리 - 홍어 & 나주곰탕
남도 물류의 집산지였던 나주. 흑산도에서 건너와 오랜 시간 영산포를 상징하는 맛으로 자리 잡은 것이 삭힌 홍어이다. 흑산도 사람들이 흑산도의 명물인 홍어를 싣고 나주에 도착했을 땐 홍어가 삭혀져 있었다. 흑산도 사람들은 회로 먹는 홍어를 삭혀진 홍어 그대로 나주 사람들은 먹기 시작했다. 다른 고기들은 삭혀서 먹으면 탈이 났지만 신기하게도 삭혀진 홍어만은 먹어도 탈이 나지 않았다고 한다. 모든 특산품이 집결해 저절로 음식문화가 발달했던 나주는 교통도 좋았기 때문에 일제강점기에는 수탈의 도시이기도 했다. 무, 쌀, 소고기 통조림이 군수용품으로 많이 수탈 되었는데 나주 곰탕은 그 소고기 통조림을 만들고 남은 소의 부산물을 가지고 만들어 지기 시작했다고 한다. 든든한 보양식으로 유명하지만 나주곰탕에는 나주 사람들의 애환과 슬픔이 담겨 있다.

▶ 세월이 흘러도 한결같은 사람들 - 희망참기름 & 나주반상
이희옥 할아버지가 모친 유점순씨가 운영했던 기름집을 이어 받아 2대째 꾸려가고 있는 희망 참기름. 33살 때부터 시작한 것이 벌써 55년째 한자리에서 기름을 내리고 있다. 어머니가 하시던 방식 그대로 바뀐 것이 없다는 이 곳. 영산포구가 활발했던 시절 할아버지의 참기름가게 또한 가장 바빴던 시절이다. 지금은 동네 사랑방이기도 한 이곳에서 고소한 참기름 냄새와 과거 영산포구가 영화를 누리던 시절 이야기를 들어본다. 나주는 나무를 잘 다루는 목공예가들이 많은 고장이다. 곡창지대의 풍요로움으로 생활에 여유가 있던 나주 사람들은 살림살이에도 관심이 많아 가구를 많이 구입했다. 궁궐에서 사용하는 가구도 나주에서 만들어 진상하는 일이 많았다. 조선시대 후기부터 60년대까지 번성했던 나주 소목공예는 현재 전라남도 무형문화재 제 14호인 나주 반장 김춘식씨에 의해 그 명맥이 이어지고 있다.

▶ 전통이 사는 그 곳 - 목사내아 & 남파고택
최고의 인재가 모였던 나주목을 관할하던 목사가 머물던 나주 목사내아. 나주 목사내아는 전라남도 문화재자료 제132호로 등록되어 있는데 조선시대 나주목사가 기거하며 살림을 하였던 집으로 상류주택의 안채와 같은 모습을 갖추고 있는 곳이다. 일제강점기 때 군수 관사로 사용하면서 원형이 변형되었으나 최근에 모두 충실하게 복원을 하였으며, 목사내아는 주변으로 객사와 정수루가 함께 있어 조선시대 관아건축양식의 원형을 이해할 수 있다는 점에서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고 할 수 있다. 목사내아와 더불어 조선시대 건축의 전통을 간직한 집 남파고택은 나주에서 유일하게 몇 대를 이어서 살고 있는 집이다. 조선시대 후기(1884년)에 남파 박재규가 건립하여 후대에 이르면서 1910년대와 1930년대에 개축한 건물로 전라남도에 있는 단일 건물로는 가장 큰 크기를 가진 개인주택이며 관아건물 형태를 모방하고 있는 건물로서 남도 지방 상류주택의 구조가 비교적 잘 나타나고 있다.

▶ 오래된 아름다움이 모인다 - 불회사
366년 인도 승려인 마라난타에 의해 창건된 불회사는 덕룡산(468m) 중턱 동백나무 숲을 두르고 호젓하게 자리잡은 사찰이다. 원래는 불호로 불리었으며 조선 정조 22년(1798년)에 화재로 건물 대부분이 소실되었다가 1800년 중건하면서 ‘부처가 모인다’는 뜻의 불회사로 바꿔 부르게 되었다. 화려하지는 않으나 보물 제1310호로 지정된 대웅전을 비롯해 명부전, 나한전, 삼성각, 요사채가 어우러져 아늑한 숲 속에 온 듯 편안한 느낌을 준다. 절 주위의 전나무, 삼나무, 비자나무 숲이 아름답고 가을이면 인근에서 가장 늦게 단풍이 드는 것으로 알려져 단풍 여행객도 즐겨 찾는다. 절 입구를 지키는 커다란 석장승 한 쌍은 남도 특유의 해학이 깃든 재미난 표정의 할아버지, 할머니 장승으로 민속자료 제 11호로 지정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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