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현미 - 엽전 열닷냥 (19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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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래 이야기

'한복남'(韓福男)이라는 이름이 다소 낯설게 느껴지시는 분들도 있겠지만, 가수로서, 작곡가로서, 또 레코드사의 사장으로서 한복남 선생님을 표현하는 수식어는 무척이나 많습니다.

평안남도 안주에서 양복점을 운영하다 해방 후 월남하여 가수로 변신한 한복남 선생님의 인생은 짧은 글로 표현하기에는 부족할만큼 파란만장했다고 할 수 있겠네요. 1919년 6월 25일 안주에서 출생한 한복남 선생님의 본명은 한영순(韓榮淳)입니다. 일제로부터 해방이 되자 공산치하를 거부하고 1946년 가족들과 함께 남한으로 내려와서 서울에 정착하게 되는데 그 곳은 종로3가에 있던 단성사(團成社)에서 돈화문 쪽으로 가다 보면 나오는 와룡동의 길가 양복점이었다고 하네요. 밝고 명랑한 성격 탓에 주위 이웃들과도 돈독하게 지내며, 공짜로 양복을 만들어 선물하기도 했다고 전해집니다.

해방 후, 6.25 전쟁이 일어나기 전까지 종로는 서울의 중심이었고, 많은 사람들로 붐비던 곳이었습니다. 밤이면 종로사거리부터 종로3가까지 야시장이 열렸고 시골에서는 이 광경을 보기위해 단체로 관광을 오기도 했다고 하네요. 잡화점부터, 풀빵 장사, 장난감 장사, 만병통치약까지 없는게 없던 종로는 지금도 그 시절 간판에 걸렸던 이름들을 심심치 않게 찾아볼 수가 있습니다. 종로 2가에는 큰 악기점이 있었는데 훗날 근처에 많은 악기점들이 생겨나고 1979년 탑골공원 정비사업을 벌이면서 근방에 있던 악기점들을한 곳에 모으면서 현재 낙원상가의 모습이 갖춰지게 되기도 합니다.

어쨌거나 한복남 선생님은 양복점 운영에 만족을 못하신 걸까요. 가수로서의 첫발을 내딛기 위해 수소문한 끝에 그 즈음 창단한 김해송 선생의 KPK악단 오디션을 치루게 되고 정식으로 데뷔를 준비합니다. 그 당시 을지로3가 근처에는 지금은 없어진 수도극장이 자리하고 있었는데, 1935년 약초극장이라는 이름으로 일본 자본에 의해 만들어진 이 곳은 1946년 수도극장으로, 또 1962년에는 스카라극장으로 이름을 바꾸게 됩니다. KPK 악단의 공연이 있던 날, 한복남 선생님은 수도극장 무대에서 그 유명한 '빈대떡 신사'로 데뷔하게 되지요. 많은 기록을 살펴보면 한복남 선생님의 데뷔가 1943년이라고 적혀 있는데, 글쎄요. 1946년에 가수 오디션을 준비한 것으로 보아 정식 데뷔는 1947년 경으로 보는 것이 맞다고 생각됩니다.
맨 처음 '빈대떡 신사'가 앨범으로 발표된 것도 1947년 아세아레코드를 통해서였습니다.

한복남 선생님은 1950년 한국 전쟁이 발발하자 부산으로 피난을 가고, 아미동 판자촌에 도미도레코드를 설립하게 됩니다. 사업가로서의 기질이 십분 발휘되는 시점이었던 것 같네요. 이렇게 도미도레코드는 1950년대를 대표하는 레코드사로서 많은 가수와 히트곡들을 배출시키게 됩니다. 또 음악교육을 따로 받지 못했음에도 불구하고 타고난 감각으로 작곡가로서도 꾸준히 활동하는 모습을 보여주게 됩니다. 금사향, 한정무, 손인호, 현인, 김정애, 황금심, 박재홍, 황정자, 남백송, 심연옥 등 기라성같은 선생님들이 이 도미도레코드를 거쳐가게 되고 황정자 선생님의 '처녀 뱃사공', '오동동 타령', '봄바람 님바람', 김정애 선생님의 '앵두나무 처녀', 손인호 선생님의 '한 많은 대동강' 등의 노래를 작곡하며 1세대 작곡가로서의 입지를 다지게 됩니다.

1955년 도미도레코드에서 발표된 '엽전 열닷냥' 앨범은 독보적인 싱어송라이터로서의 활동을 증명하는 작품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음반의 뒷면에는 황정자 선생님의 '오동동 타령'이 실려있는데 전쟁 이후 많은 것을 잃고 슬픔에 빠진 우리 국민들에게 희망을 주는 노래들로 지금까지도 큰 사랑을 받고 있습니다.

사실 '엽전'이라는 단어는 우리 국민들이 스스로를 비하하며 쓰던 말이라고 전해지는데 굳이 제목에 엽전이라는 말을 붙인 이유가 무엇일까요? 조선시대 숙종 때부터 발행하여 사용된 '상평통보'(常平通寶)는 '늘 같은 가치로 널리 사용되는 보배'라는 귀한 뜻이 담겨 있는 우리나라의 화폐였는데요. 이것이 조선 말기에 오면서 재정의 궁핍을 이유로 주조를 남발하여 가치가 급속히 하락하게 되고, 더욱이 개항 이후 외화가 유입되면서 엽전은 그야말로 보잘 것 없는 물건으로 전락하고 만 것이지요. 변해가는 세상 물정에 따라가지 못하고 융통성없게 대처하는 조선인들을 '엽전'이라는 표현으로 비하한 된 것이 1980년대까지 오랫동안 사용되었다고 합니다. 비슷한 뜻으로 '무지렁이'라는 말도 있는데, 이것은 낡아서 더이상 쓸 수 없는 물건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답니다.

'엽전 열닷냥'은 이런 부정적인 의미를 오히려 반어법으로 밝게 풀어낸 노래라고 할 수 있는데요. 조선시대 과거 시험을 소재로 삼아 인생역전의 희망을 꿈꾸게 하는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대장군 잘 있거라 다시 보마 고향산천
과거보러 한양 천리 떠나가는 나그네에
내 낭군 알상급제 천번 만번 빌고 빌며
청노새 안장위에 실어주던
아 엽전 열 닷냥

어젯 밤 잠자리에 청룡꿈을 꾸었더라
청노새야 흥겨워라 풍악따라 소리쳐라
금방(金榜)에 이름 걸고 금의환향 그 날에는
무엇을 향자에게 사서 가리
아 엽전 열 닷냥"

마을 어귀에 서 있는 대장군 장승을 돌아보며 한양으로 시험을 치르러 떠나는 남자는 당나귀에 몸을 싣고, 낭군을 떠나보내는 여인 향자는 노잣돈 엽전 열닷냥을 건네줍니다. 이 냥이라는 단위는 무척 큰 것이어서 일전짜리 엽전이 100개가 한냥, 그러니까 1500개가 모여야 엽전 열닷냥이 되는 것이지요. 그렇다고 해서 아주 큰 돈은 아니고 현재의 화폐가치로는 150~300만원 정도라고 합니다.

지체가 높은 윗 사람을 만날 때 '알현하다'라는 표현을 쓰는데, '알성급제'(謁聖及第)라는 말은 임금을 모신 과거시험에서 합격한다는 뜻으로, 그야말로 인생역전이 아닐 수가 없겠네요. 또 2절에서는 '금방'(金榜)이라는 단어가 등장하는데, 이 또한 과거시험과 관련된 것으로 조선시대에 소식을 알리기 위해 벽이나 문에 붙이던 방(榜) 중에서 과거에 급제한 사람의 이름을 써서 알리는 것을 금방이라고 불렀습니다.

이 노래를 만들 무렵에는 아직 사법시험이 등장하기 전이라, 1963년 사법시험이 시행된 후에 노래를 만들었다면 제목이 바뀔 수도 있었겠다는 재미있는 상상을 해봅니다. '엽전 열닷냥'은 같이 수록된 '오동동 타령'과 함께 온 국민의 슬픔을 달래주는 노래로 자리매김했습니다.

노래에 등장하는 이야기는 우리의 현실에서는 마주할 수 없는 먼 옛날의 역사이지만, 지금 불러보아도 흥겹고 공감이 가는 대목이 많습니다. 같은 정서를 가지고 이 땅에 살아온 이유일까요. 오늘 들려드리는 '엽전 열닷냥'은 비단 노래가 품고 있는 내용을 다 이해하지 못한다 해도 옛날 어르신들이 흥겹게 부르시던 그 기억만으로도 우리에겐 소중한 유산이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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