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현미 - 이별의 부산 정거장 (1954)

Описание к видео 주현미 - 이별의 부산 정거장 (1954)

노래 이야기

명실공히 박시춘-남인수 선생님 콤비는 우리 가요 역사상 가장 완벽한 조합이 아니었을까 생각합니다.
이 '이별의 부산 정거장' 한 노래만 들어보아도 두 선생님들의 호흡은 요즘 표현으로 '최강케미'라고 부를 수 있겠네요.

'이별의 부산 정거장'은 우리에게 무척이나 익숙한 노래이지만, 첫 인상은 어쩐지 아이러니한 구석이 있습니다.
6.25때 부산으로 피난갔던 화자가 환도열차에 몸을 싣고 부산정거장에서 이별을 맞이하는 슬픈 내용에 어깨가 들썩거리는 신나는 폴카 리듬이라니, 어찌보면 우리 모두 노래에 익숙해져서 당연한 듯 느껴질 수도 있겠네요.
'아이러니'라는 단어의 뜻이 반어(反語)이듯이, 몸부림치는 몸을 뿌리치고 떠나가는 처절한 슬픔을 더욱 극단적으로 표현하기 위한 박시춘 선생님의 음악적 선택이었는지, 아니면 전쟁 직후 피난살이의 고된 삶을 마치고 서울가는 열차에 몸을 싣고 떠나는 희망적인 표현이었는지 알 수는 없지만 이 노래가 우리 역사의 슬픈 한 장면을 너무나 생생하게 그려내고 있다는 사실은 분명합니다.

'이별의 부산 정거장'은 '호동아'라는 필명으로 유호 선생님이 가사를 썼고, 박시춘-남인수 선생님의 콤비로 휴전 이듬해인 1954년에 발표되었습니다. 해방 이후 우리의 힘으로 방송을 시작할 무렵부터 KBS 경음악단 지휘자로 활동했던 최고의 작곡가이자 연주자 박시춘 선생님과, 드라마 작가이자 작사가로서 폭넓은 활동을 했던 유호 선생님, 또 1930년대부터 박시춘 선생님의 지도로 명가수로 자리잡은 남인수 선생님의 조합은 소름끼칠만큼 환상적입니다. 그 시절 우리나라에서 이 노래를 모르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을 것입니다.

환도 전 임시수도시절의 부산역은 지금의 자리가 아닌 중앙동 쪽 부산무역회관 자리에 있었습니다. 1908년 6월에 착공하여 1910년 10월 31에 준공된 르네상스 양식의 건물이었다고 합니다. 1953년 11월에는 대화재로 인해 중앙동, 동광동, 영주동 일대가 초토화되면서 건물 전체가 소실되고 말았습니다. 1965년에는 구 초량역과 함께 부산진역으로 통합되었다가, 1969년 지금의 부산역의 위치로 옮기게 되면서 현재에 이르고 있습니다.

당시의 피난살이의 모습은 어땠을까요?

"보슬비가 소리도 없이 이별 슬픈 부산 정거장
잘가세요 잘있어요 눈물의 기적이 운다
한 많은 피난살이 설움도 많아
그래도 잊지 못할 판자집이여
경상도 사투리에 아가씨가 슬피우네
이별의 부산 정거장"

1절의 가사에는 이별 전 회상을 담고 있습니다. 1,000일간의 임시 수도였던 부산은 전쟁 직전 약 47만명의 인구가 1.4후퇴 이후 84만명 정도로 급증하게 됩니다. 당연히 그 많은 피난민을 수용할 수 있는 시설은 턱없이 부족했고 정부로서는 그들에게 기껏해야 신분증을 발급해주는 것 외에는 해줄 것이 없었습니다. 급한 대로 수용소를 늘리기는 했지만 많은 사람들은 스스로 주거 공간을 마련해야 했습니다. 빈터만 보이면 닥치는대로 판자집을 지어나가기 시작했고 그마저도 집을 지을 재료가 없어 미군부대에서 버린 종이박스나 가마니를 줍는 것이 전부였습니다. 위생 문제, 수도 문제, 교통 문제 또한 피난민들을 괴롭혔지만 기족들이 그저 누워 잘 수만 있으면 더 바랄 것이 없던 상황이었지요.
당시 신문기사를 보면 이렇게 지어진 집들을 바라크라고 불렀는데, 짐작해보면 배럭(barrack)이라는 단어를 부르기 쉽게 표기했던 것 같습니다.
"잘 가세요. 잘 있어요." 열차의 기적소리는 이별의 아픔을 대신하고 있고 한 많은 피난살이에도 부산생활에 정이 들어 만감이 교차하고 있음을 느낄 수 있습니다.

"서울 가는 십이 열차에 기대 앉은 젊은 나그네
시름없이 내다보는 창 밖에 등불이 존다
쓰라린 피난살이 지나고 보니
그래도 끊지 못할 순정 때문에
기적도 목이 메어 소리 높이 우는구나
이별의 부산 정거장"

2절에서는 부산에서 맺은 인연에 대한 아쉬움을 노래하고 있습니다. 십이열차라는 말은 당시 열차에 매긴 번호를 뜻하는데 경부선의 경우 홀수는 하행선, 짝수는 상행선이었습니다. 유추해보면 십이열차란 부산에서 서울로 가는 6번째 열차가 되겠네요. '도착까지 12시간이 걸려 십이열차다.', '12개의 객차를 달고 있어서 십이열차다.' 라고 하는 것은 잘못된 정보입니다.

"가기 전에 떠나기 전에 하고 싶은 말 한마디를
유리창에 그려보는 그 마음 안타까워라
고향에 가시거든 잊지를 말고
한 두자 봄소식을 전해 주소서
몸부림 치는 몸을 뿌리치고 떠나가는
이별의 부산정거장"

3절은 열차 밖, 그리운 이를 떠나보내는 부산 사람의 마음을 그리고 있습니다. 피난민들 중에는 가족단위가 많았지만 미혼의 남성들도 혼자서 내려오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자연스럽게 피난민들은 정착하는 과정에서 마을을 형성하게 되었고 그 속에서 여러 사연들이 많이 생겨났을 것입니다. 당감동 아바이 마을, 아미동 무덤 마을, 우암동 피난민 마을 등이 그 당시 피난민들에 의해 형성된 곳입니다. 일면식이 없던 사람들은 힘든 현실을 공유하면서 자연스럽게 서로 의지하고 가까워지게 되었습니다. 정작 수도를 서울로 다시 옮기게 되면서 다시 생이별을 해야 했던 것이지요. 전쟁은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우리 민족에게 정말 크나큰 상처를 주었습니다.

흥겨운 리듬에 어깨를 들썩이면서 부르게 되는 '이별의 부산 정거장'.
가사를 음미하며 부르다 보면 어느새 눈물이 고이고 맙니다.
'돌아와요 부산항에', '부산갈매기' 등과 함께 부산을 대표하는 노래로 남아있지만, 품고 있는 이야기가 너무 슬픈 탓에 공식적인 단체나 행사에서는 찬밥신세가 되었지요.
눈을 감고 그 시절 우리의 아픔을 떠올려 보면, 이 짧은 하나의 노래가 마치 드라마 한편을 보는 듯한 감동으로 다가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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