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현미 - 찔레꽃 (19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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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래 이야기

백난아 선생님의 '찔레꽃'은 KBS 가요무대 역사상 가장 많이 불린 노래로 선정될 만큼 온 국민의 사랑을 받아 온 노래입니다.
노래가 발표된 지 벌써 77년이 지났지만, 아직도 우리의 가슴속에 국민가요로 굳건히 자리매김하고 있습니다.

일본 제국주의가 극에 달하던 1940년대 초, 일본은 전 세계를 향해 선전포고를 하고 급기야 1941년 12월에는 미국 하와이의 진주만을 공습하기에 이릅니다.
이러한 혼돈의 시기에 태평레코드와 조선일보가 공동으로 주최한 제1회 레코드예술상-신인가수대항 콩쿠르에서 '오금숙'이라는 이름의 젊은 신인 가수가 입상하게 되고, 심사위원이었던 김교성, 이재호, 백년설 등의 선생님들은 신인 가수와 함께 음반작업에 착수합니다.
집안의 반대를 무릅쓰고 태평레코드사의 전속 가수로 계약을 하면서, 백년설 선생님이 본인의 성을 붙여 양딸로 삼고 이 가수에게 예명을 주게 되는데 바로 '백난아'라는 이름으로 활동을 시작하게 된 것이지요.
당시 백년설 선생님이 보시기에, 백난아 선생님의 이미지가 난초같이 청초하고 순수한 느낌이었을까요.
어쨌든 데뷔곡 '오동동 극단'으로 유명세를 타기 시작한 선생님은 '갈매기 쌍쌍', '망향초 사랑', '아리랑 낭낭' 등 많은 곡들을 히트시키게 됩니다.
해방 전까지 태평레코드의 전속 가수로서 많은 인기를 얻다가, 해방 후에는 '파라다이스 쇼단'을 운영하며 전국 순회공연을 다니고 1949년부터는 럭키레코드와 계약을 하면서 '낭랑 18세'로 큰 인기를 얻게 됩니다.
'찔레꽃'은 발매 직후에도 인기를 끌었지만, 광복 이후 또 6.25전쟁을 거치면서 다시 큰 인기를 끌기 시작했습니다.
요즘 표현으로 말하자면 '차트 역주행'이라고 할 수 있겠네요.
이미자 선배님은 10살 때 부산 피난 시절 당시 백난아 선생님의 공연을 보고 가수가 되겠다는 꿈을 품었다고 고백하신 적이 있습니다.

"찔레꽃 붉게 피는 남쪽나라 내 고향
언덕 위에 초가 삼간 그립습니다.
자주 고름 입에 물고 눈물 젖어
이별가를 불러주던 못 잊을 동무야

달 뜨는 저녁이면 노래하던 세 동무
천리객창 북두성이 서럽습니다
삼년 전에 모여 앉아 백인 사진
하염없이 바라보니 즐거운 시절아

연분홍 봄바람이 돌아드는 북간도
아름다운 찔레꽃이 피었습니다
꾀꼬리는 중천에 떠 슬피 울고
호랑나비 춤을 춘다 그리운 고향아"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찔레꽃은 하얀색의 꽃인데 이 '찔레꽃' 가사 속의 꽃은 어째서 붉게 핀다고 했을까요?
혹자는 이 '찔레꽃'이라는 명칭이 장미과의 가시가 있는 모든 꽃을 총칭한다고도 하지만, 2절의 천리객창(千里客窓), 3절의 북간도 등의 가사를 보면 북쪽 타향에서 고향을 그리워하는 마음이 사무쳐 흰 꽃을 붉은 빛으로 표현했다고 보는 편이 맞을 것 같습니다.
'철의 객점'으로 알려진 것은 잘못 표기된 것으로 '천리객창'으로 고쳐 부르는 것이 맞습니다.
천리객창은 ‘고향집을 떠나 먼 곳에서의 고달픈 객지살이’란 뜻이고,
또 1절 마지막 가사로 흔히 알고 있는 '못 잊을 사람아'도 '못 잊을 동무야'가 원래의 가사입니다.
2절에서 '작년 봄에 모여 앉아 찍은 사진'으로 알려진 가사는 '삼년 전에 모여 앉아 백인 사진'이 맞습니다.
당시에는 사진을 '찍는' 것이 아니라 '박는'다는 표현이 친숙했던 것으로 추측되고, 이 '박히다'라는 말은 경기도 방언으로 '백이다'라고 쓰여지고 있습니다.

분단 이후 이데올로기의 대립이 시작되고, '동무'라는 어휘가 공산주의 체제에서 주로 사용되는 탓에 금기어로 낙인찍히는 상황이 벌어지게 됩니다.
또한 3절에 등장하는 북간도(北間島)라는 지명조차 가사에서 함부로 다룰 수 없던 탓에 아름다운 3절의 가사를 통째로 들어내고 왜곡된 상태의 2절 짜리 노래로 불리게 되는 상황이 되고 맙니다.

노래의 멜로디가 그 시대의 감성을 표현한다면, 가사는 시대의 삶과 역사를 그려냅니다.
'찔레꽃'은 세대를 초월하여 우리 민족의 애창곡이 되었습니다.
백난아 선생님은 제주를 대표하는 여성의 상징이 되었고, 한림읍 명월리에는 선생님을 기념하는 기념비와 기념관이 건립되었습니다.
또 해마다 백난아 선생님을 기리는 백난아 가요제가 열리고 있기도 합니다.
1992년 돌아가실때까지 '가요무대'를 비롯 평생 왕성한 활동을 하셨고, 타계 직전 발행된 '백난아 히트애창곡집'에서는 다음과 같은 인사말을 남기셨습니다.

‘이 생명 다할 때까지’

그리운 세월입니다.
풋 복숭아 같이 보송보송하던 열다섯 살에 태평레코드사 전국 가요콩쿠르에 당선되어 전속가수가 된 뒤로 울고 웃던 무대생활이 어느덧 47년째라니...
생각하면 유리알 같이 눈물이 돌아 번져버릴 것 같은 아름다운 청춘이었습니다.
어느 간이역에 피어난 키 큰 해바라기같이 유달리 외로움을 잘 타던 내가, 세상 어려움과 싸우면서 헤쳐 온 나날들이 지나간 꿈결처럼 그립기만 합니다.

‘망향초 사랑’, ‘아리랑 낭랑’, ‘갈매기 쌍쌍’, ‘오동동극단’, 찔레꽃‘, ’직녀성‘, ’무명초 항구‘, 황하다방’, 도라지 낭랑‘, ’아버님 전에‘, 아주까리 선창’, ‘간도선’, ‘인생극장’, ‘금박댕기’, ‘낭랑 십팔 세’...

한 구절 한 구절 외워보는 노래마다 잃어버린 사연들이, 그리운 얼굴들이 이슬처럼 묻어납니다. 미운 사람, 고운 사람이 따로 없을 것 같습니다. 무작정 그립고 무작정 만나고 싶을 뿐입니다.

김교성 성생님, 김영일 선생님, 김용환 선생님, 박시춘 선생님, 손목인 선생님, 이재호 선생님, 이용준 선생님, 반야월 선생님, 유호 선생님...
알게 모르게 힘이 되어주시고 사랑해주시던 인정 많은 선생님들을 잠시도 잊지 못합니다.
찬바람 불던 식민 치하의 무대에서, 만세소리 드높던 해방의 무대에서, 포연이 자욱한 6.25의 무대에서 뜨겁게, 뜨겁게 성원해 주시던 팬들의 박수소리, 또한 잊을 수가 없습니다.

아직도 사랑이 많고 아직도 열정이 많습니다. 아직도 그리움이 많고 아직도 할 일이 많습니다.
팬들이 있고 무대가 있는 한, 이 생명 다할 때까지 노래할 것입니다.

-1988년 12월, 백난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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