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현미 - 동백아가씨 (1964)

Описание к видео 주현미 - 동백아가씨 (1964)

노래 이야기

우리 가요사에서 1964년은 많은 기록이 쏟아진 해였습니다. 1964년에 록그룹
‘키보이스’와 신중현 선배님의 ‘에드훠’에 의해서 한국 최초의 록음반이 등장했고요.  서수남 선배님을 필두로 한 4인조 남성 보컬그룹 ‘아리랑 브라더스’가 최초로 통기타 음반을 발표하면서 대중음악의 르네상스 시대를 열었던 해가 바로 1964년이었죠. 1960년대에는 경제가 활성화되면서 대중가요계에서는 록, 포크, 팝, 재즈 등 새로운 장르의 노래들이 속속 발표되었고, 상대적으로 트로트 쟝르가 잠시 주춤했지만, 1964년, 우리나라 최초로 100만장 판매기록을 세운 트로트가 탄생하면서 트로트의 중흥시대를 열었는데요. 그 노래는 바로 불멸의 명곡!! 이미자 선배님의 ‘동백아가씨’입니다.
 
500여장이 넘는 최다음반을 발표하고, 2300곡이 넘는 노래를 취입하면서 기네스북에 오른 이미자 선배님에게는 또하나의 어마어마한 기록이 있는데요. 그것은 바로 500편에 가까운 영화와 TV드라마, 그리고 라디오 연속극 주제가를 취입했다는 사실입니다.   
 
‘동백아가씨’ 역시 영화 주제가였는데요. 당대 최고 배우였던 ‘신성일’선배님과
‘엄앵란’선배님이 주연을 맡았던 이 영화는 1963년 동아방송의 라디오 드라마
‘동백아가씨’를 리메이크한 영화 였습니다. 드라마와 영화 모두 오페라 ‘춘희’의 스토리를 모티브로 만들어졌는데요.  남쪽섬의 처녀는 서울에서 내려온 한 대학생과 사랑을 맺고 헤어지는데요. 뒤늦게 임신 사실을 알게된 그녀는 남자를 찾아 서울로 올라가지만,  이미 남자는 외국유학을 떠난 뒤였죠. 결국, 미혼모의 몸으로 거리를 전전하던 그녀는 동백Bar의 여급으로 나가면서 생계를 잇다가, 어느날, 꿈에도 잊지 못했던
옛애인을 만나게 됩니다. 하지만, 그는 이미 다른 여인과 결혼하여 단란한 가정을
이루고 있었고요. 여자는 아이를 남자에게 보내고, 슬픔을 간직한 채 다시 섬으로 돌아간다는 스토리였죠. 
 
이 영화를 기점으로 1960년대 말에는 신파적 감수성의 미혼모 소재 영화들이
유행하게 됐는데요. 주제가였던 ‘동백아가씨’ 역시 고통을 인내하며 눈물 흘리는
신파적 감수성을 이미자 선배님의 목소리로 애절하게 표현하면서 1960년대 후반
트로트의 부활을 이끌었습니다. 
 
 
“ 헤일 수 없이 수많은 밤을 
  내 가슴 도려내는 아픔에 겨워 
  얼마나 울었던가 동백 아가씨 
  그리움에 지쳐서 울다 지쳐서 
  꽃잎은 빨갛게 멍이 들었소 
 
  동백꽃잎에 새겨진 사연 
  말못할 그 사연을 가슴에 묻고 
  오늘도 기다리네 동백 아가씨 
  가신 님은 그 언제 그 어느 날에 
  외로운 동백꽃 찾아오려나” 
 
 
백영호 선생님이 작곡하고, 한산도 선생님이 작사한 ‘동백아가씨’는 이미자 선배님의 영롱하고 애절한 목소리를 통해서 여인의 깊은 한과 슬픔을 완벽하게 표현했고요.
그 결과, 많은 사람들의 심금을 울리면서 신인가수 ‘이미자’를 가요계의 신데렐라
‘이미자’로 만들어 주었는데요. 
 
사실, ‘동백아가씨’는 원래 처음부터 이미자 선배님이 부를 노래가 아니었다고 하죠. 이 노래를 취입하기로 내정됐던 가수는 당대 최고의 인기를 구가했던 최숙자 선배님이었지만, 신생 레코드 회사였던 ‘지구레코드사’가 감당하기엔 최숙자 선배님의 개런티가 너무 부담스러웠고요. 그러다 언젠가 ‘열아홉 순정’으로 데뷔한 신인가수 ‘이미자’의 애절한 노래를 귀담아 들었던 ‘동백아가씨’의 작곡가 ‘백영호’ 선생님이 ‘이미자’ 선배님을 추천하면서 대타로 ‘동백아가씨’를 부르게 됐다고 하니까, 노래와 가수 사이에도
운명이란 게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동백아가씨’의 녹음에는 재미있는 에피소드가 숨어있는데요. 1964년 무더운 여름날, 스카라 극장 앞 목욕탕 건물 2층 녹음실에서 낡은 선풍기 한 대로 ‘동백아가씨’를 녹음할 때, 이미자 선배님은 첫째를 임신해서 만삭의 몸이었는데요. 공교롭게도 같은
녹음실에서 역시 둘째를 임신한 만삭의 현미 선배님도 신곡 ‘떠날 때는 말 없이’를 녹음했다고 하죠. 그리고, 이때 녹음한 ‘동백아가씨’와 ‘떠날 때는 말없이’ 두 곡이
모두 대히트를 하자, 그때부터 가요계에선 ‘만삭에 녹음하면 대박이 난다’라는
속설까지 생겼다고 하는데요. 이미자 선배님의 ‘동백 아가씨’는 그 당시 35주 연속
가요순위 1위를 차지했고, 100만장이 넘게 판매되면서 전설적인 인기를
누리게 됩니다.  
 
이 당시 이미자 선배님의 인기는 하늘을 찔렀는데요. 극장주들은 그때까지 2,000원이던 극장쇼 출연료의 20배가 넘는 파격적인 금액을 제시하면서 ‘이미자 모시기’에
사활을 걸었고요. 음반을 사고싶어도 구하지 못하는 경우도 속속 생기다보니까,
작곡가 백영호 선생님이 술집에 가면, 술값 대신 ‘동백아가씨’ 음반을 한 장 구해달라고 부탁할 정도였다고 생전에 회고하신 적도 있습니다. 오죽하면 그 당시에 주로
외국팝을 선호했던 충무로 음악감상실 ‘세시봉’에서도 젊은이들이 ‘동백 아가씨’를
합창했다니까, 이 노래가 얼마나 큰 사랑을 받았는지 미루어 짐작할 수 있는데요. 
 
이렇게 ‘동백아가씨’는 세대와 계층을 초월해서 사랑받았던 국민가요였고,
이미자 선배님의 열풍은 현해탄을 넘어 일본에까지 진출하게 됩니다.  1966년 일본
빅터레코드에서 ‘동백아가씨’를 일본어로 개사해서 발표했는데요. 그 당시
이미자 선배님의 인기를 시샘하던 경쟁레코드사의 입김이 작용했고, 당시 한일국교
수립 이후, 반일 감정이 극도로 악화되면서 ‘이미자가 일본말로 노래를 취입했다’라는 소문이 안좋은 영향을 주면서, 결국 ‘동백아가씨’는 ‘일본풍’이라는 이유로 금지곡이
되고 맙니다. 그리고, 1987년이 돼서야 이미자 선배님의 ‘동백아가씨’는
‘유달산아 말해다오’ 등 5곡과 함께 해금되었고, 다시 공식적으로 부르고 들을 수 있게 되었죠. 
 
많은 사람들이 그 시대에도, 그리고 지금도 여전히 ‘동백 아가씨’를 사랑하는 것은
노래 속에 우리의 인생을 발견하기 때문일 겁니다. ‘헤일 수 없이 수많은 밤’을
아파했고, ‘빨갛게 멍이 들었던’ 우리의 인생. 특히, 자식 뒷바라지 하느라,
평생 호강 한번 못해 보고 세상을 떠난 우리 어머니, 동생들 공부시키느라 자신의 삶을 희생했던 누나와 여동생의 모습이 겹쳐지기 때문에 이 노래를 부를 때마다 가슴 깊은 곳이 아려옵니다. 이렇게 ‘동백아가씨’에는 애틋한 우리 인생이 담겨있기에 지금도,
앞으로도 여전히 사랑받는 명곡으로 우리 곁에 함께하리라 생각합니다.

Комментарии

Информация по комментариям в разработк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