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현미 - 사의 찬미 (19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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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래 이야기

우리 나라 역사상 최초로 히트를 기록한 대중가요 '사(死)의 찬미(讚美)'는 발표된 지 백년 가까이 지난 지금도 귀에 익숙하게 다가옵니다. 드라마나 영화, 뮤지컬 혹은 소설 등을 통해 '사의 찬미'의 주인공인 윤심덕 선생님에 대한 많은 이야기들이 전해져 오기 때문인데요. 무엇이 그녀를 그토록 기구한 운명으로 끌어들인 것일까요. 또 죽음을 찬미한다는 이 노래 발표 직후 그녀가 사망하게 된 배경에는 어떤 이야기들이 숨겨져 있는 것일까요.

한국인에 의해 처음 작사, 작곡된 첫 대중가요로는 1927년 처음 불려진 '강남달', 1928년 발표된 '황성옛터' 등을 꼽을 수 있습니다. 번안곡을 모두 포함한 최초의 대중가요로는 1926년 제작된 이 '사의 찬미'를 꼽는 사람들도 있지만 '이 풍진 세상을~'로 시작하는 '희망가'가 1923년부터 불리기 시작했다고 하니 일단 최초라는 타이틀은 내려놓아야 할 것 같네요.

이오시프 이바노비치(Iosif Ivanovici)에 의해 작곡된 '사의 찬미'의 원곡은 본래 제목이 '도나우강의 잔물결'입니다. 루마니아의 작곡가 이바노비치는 군악대에서 근무하며 주로 힘찬 행진곡이나 팡파르 곡을 작곡했습니다. '도나우강의 잔물결' 또한 1880년에 3/4박자의 왈츠로 만들어진 행진곡이었는데, 1926년 윤심덕 선생님에 의해 가요로 발표되면서 느린 템포에 비극적인 느낌을 극대화하게 되지요.

"광막한 광야에 달리는 인생아
너의 가는 곳 그 어디이냐
쓸쓸한 세상 험악한 고해에
너는 무엇을 찾으려 하느냐

눈물로 된 이 세상이
나 죽으면 고만일까
행복 찾는 인생들아
너 찾는 것 허무

웃는 저 꽃과 우는 저 새들이
그 운명이 모두 다 같구나
삶에 열중한 가련한 인생아
너는 칼 우에 춤추는 자로다

눈물로 된 이 세상이
나 죽으면 고만일까
행복 찾는 인생들아
너 찾는 것 허무

허영에 빠져 날뛰는 인생아
너 속였음을 네가 아느냐
세상의 것은 너의 게 허무니
너 죽은 후에 모두 다 없도다

눈물로 된 이 세상이
나 죽으면 고만일까
행복 찾는 인생들아
너 찾는 것 허무"

정말 인생이 허무하게 느껴질 만큼 비관적이고 염세적인 내용을 담고 있는 가사입니다. '사의 찬미'의 가사를 붙인 사람이 윤심덕인가 혹은 그녀의 애인이었던 김우진이었을까 하는 논란은 계속되고 있는데요. 어느 쪽도 확실한 근거는 없습니다.

1897년 1월 평양에서 출생한 윤심덕 선생님은 가난한 집안의 4남매 중 둘째로 태어났습니다. 그녀의 어머니는 당시 미국인 여의사 홀 부인이 운영하는 광혜원에서 간호보조사로 근무하면서 자연스럽게 서구적인 사고방식을 가지게 되었다고 합니다. 넉넉치 않은 형편이었지만 교육에 힘을 쏟았던 어머니 덕에 윤심덕 선생님은 신학문을 배우며 성장할 수 있었지요. 그렇게 진남포 보통학교와 평양의 숭의여학교를 거쳐 당시 여학교로서는 최고의 학벌로 인식되던 경성의 경성여고보 사범과에 진학하게 됩니다. 경성여고보는 현재 경기여고로 이어져 100년이 넘는 역사를 자랑하고 있기도 하지요.

졸업 후에는 당연히 서울(경성)이나 평양의 좋은 보통학교에 교사로 부임될 것이라 생각했던 윤심덕 선생님의 기대와는 달리 총독부의 학무국에서는 그녀를 강원도 원주로 발령보내게 됩니다. 학창시절 내내 성적이 우수했던 윤심덕 선생님은 이러한 처분에 화가 났고 과감히 '철밥그릇'을 내던지고 유학을 결심하게 되지요.

평소 노래하는 것을 좋아했던 윤심덕 선생님은 어머니가 일하고 있던 광혜원의 홀 부인이 주선한 기회를 얻어 총독부 관비유학생으로 동경음악학교 성악과에 입학하게 됩니다. 당시 유학생들 사이에서는 윤심덕 선생님과 함께 미술 전공으로 유학와 있던 나혜석 선생님이 선망의 대상이었다고 합니다. 훗날 연인사이로 발전하게 되는 김우진 선생을 비롯해 홍난파, 마해송, 김기진 등 젊은 인재들과 함께 극단을 꾸려나가면서 성악가로서의 자질을 키우게 됩니다.

김우진 선생은 장성 군수의 아들로 태어나 유복한 가정에서 자랐는데, 어릴 적부터 문학을 좋아해 글 쓰는 것을 즐겼다고 합니다. 집안에서는 구마모토농업학교로 유학을 보냈지만 몰래 와세다대학 영문과로 학교를 옮기게 되고 희곡을 집필하며 극단의 작품들을 제작하고 순회 공연을 다니게 됩니다. 서로의 예술적 재능을 알아보면서 사랑을 키워나가기 시작한 두 사람은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이란 것을 알면서도 깊이 빠져들게 되었답니다. 김우진 선생은 이미 결혼해 자식까지 있는 상태였기 때문이지요.

이후 윤심덕 선생님은 귀국하며 '조선 최초의 소프라노'라는 타이틀과 함께 엄청난 인기를 누리게 됩니다. 큰 키에 노래 실력도 빼어났던 그녀는 많은 남심을 자극하며 올라가는 무대마다 만원을 이루게 되지요. 하지만 당시는 지금 우리가 상상하는 연예계와는 사뭇 다른 모습이었기 때문에 치솟는 인기에도 불구하고 경제적으로는 늘 궁핍한 생활을 해야 했습니다. 그 와중에 동생의 미국 유학이 결정되자 경비를 마련해주기로 결심한 윤심덕 선생님은 전속 계약이 되어있던 일본의 닛또(日東) 레코드에서 500원을 받고 26곡을 녹음하자는 제의를 수락하게 됩니다.

그렇게 1926년 7월 동생 윤성덕과 함께 녹음을 위해 일본으로 떠난 윤심덕 선생님은 예정에 없었던 '사의 찬미'를 동생의 피아노 반주에 맞추어 녹음하게 됩니다. 7월 26일에는 녹음을 마치고 받은 돈으로 동생을 요코하마 항에서 미국으로 가는 배에 태워보낸 행적이 확인되었습니다.

그리고 일주일 뒤 충격적인 뉴스가 전해집니다. 윤심덕과 김우진이 시모노세키를 떠나 부산항으로 오는 배 위에서 현해탄으로 몸을 던져 자살했다는 비극적인 소식이었지요. 두 사람의 사랑과 죽음에 대해서는 많은 루머와 추측들이 생겨났습니다. 자살이 아닌 타살이었다든지, 혹은 자살을 위장해 자취를 감추고 어딘가에서 살고있을 것이라는 등 사람들의 의혹은 커져만 갔습니다.

어찌되었건 전국을 떠들썩하게 만든 특종을 홍보 수단으로 이용한 닛또레코드는 엄청난 수익을 올리게 됩니다. 음반은 물론이고 당시 집한채 가격이던 유성기가 품절이 될 정도였다고 하네요.

'사의 찬미'라는 노래가 우리 나라 음악사에 미친 영향은 실로 대단했습니다. 사건이 있은지 1년 뒤인 1927년에는 콜롬비아 레코드사가 국내에 지사를 설립했고, 이듬해인 1928년에는 빅터레코드가 진출하게 되었지요. 대중가요 음반산업의 시발점이 된 것이지요.

윤심덕 선생님이 '사의 찬미'를 녹음할 때 자신의 미래를 예견한 것인지 혹은 우리가 알지 못하는 어떤 사건이 있었는지는 단정지어 말할 수는 없지만, 이 노래를 시작으로 우리 대중가요의 역사가 꽃을 피우게 되었다는 점에서 볼 때에도 '사의 찬미'는 큰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사의찬미#주현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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